LERICI
분위기에 대하여
Atmosphere

아마 머지않아 모든 직업이 그렇게 되겠지만, 디자이너가 가장 공을 들여야 하는 부분은 인터뷰입니다. 만들기란 곧 사용자와의 대화이고, 옷을 짓는 일은 입는 이의 삶과 욕망을 이루는 일입니다. 나는 그동안 많은 신사분들을 만났습니다. 마주 앉아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몸이 움직이는 방식을 관찰해 왔습니다. 디자인이 그저 형태와 치수에 대한 단순한 작업이라면 불필요한 과정이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라면, "어떻게 하면 멋있어질 수 있나요?" 막막하고 어려운 질문입니다. 아마 이런 질문이 탄생한 배경에는, 정신적 가치를 강조하기 위해 몸과 외양外樣을 '껍데기'로서 병치juxtaposition하곤 했던 관념론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겉은 없고, 겉으로 배어 나오지 않는 속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개념적으로 나뉘어 있을 뿐이죠. 

 저는 오랫동안 멋내기의 종착지를 '자신만의 분위기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분위기란 것은 세월이 가며 저절로 깃들기도 합니다만, 결코 간편하게 해결되는 법이 없습니다. 희귀한 애호를 자랑하고 고가의 물건으로 호사스럽게 꾸밀 수는 있겠으나, 그런 것이 정말 '멋'이었다면 저런 질문이 나오지도 않았겠지요. 존재의 분위기란 무엇일까요.

Umberto Eco, 『Storia della Bellezza, (2004)』
Umberto Eco, 『Storia della Bruttezza, (2007)』

우리는 분위기 없이 살고 있다

새삼스럽지만,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비례와 조화, 빛과 색채, 우아함과 이성, 숭고, 낭만, 자연미, 기계의 정교함과 추상, 패턴, 재료의 질감과 물성. 선하고 좋은 것들만 아름다움을 독점하는 건 아닙니다. 슬픔과 우울함, 모든 것이 실격된 비장함에도 아름다움은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추하고 악한 것에서 조차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합니다. 아름다움은 물질과 관념을 넘나들죠.  

우리의 심리적 감성은 믿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아름다움을 감지합니다. 어떤 사물이나 공간, 사람을 처음 대면하는 순간, 내면에서는 순간적인 거부감과 즉각적인 이해, 자발적 정서 반응이 생겨납니다. 조금만 훈련한다면 전체에서 작은 차이를 감지하고, 단번에 본질을 파악하고, 뉘앙스를 연결해 내어 그 안의 시적 분위기를 음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첫인상은 본능적이고, 직관적이며, 매우 인간적입니다.  

이렇게 심미의 영역에서 복잡한 연계를 촉발시키는 그 무언가를 나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이때 분위기란, 주제에 배어든 하나의 지배적 정서로 적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범한 사물도 분위기라는 옷을 입으면 마치 연금술을 부린 것처럼 특별한 존재감을 나타내고, 반면 아무리 비싼 소재를 덧대고 유명한 이름을 덧붙인 제작품이어도 분위기가 없다면 눈길을 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대상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이는 해석되기보다, 대상을 감정으로 음미할 수 있도록 만들어 즉각적이고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잘 인지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이토록 다양한 아름다움이 넘쳐나는데, 우리가 생각보다 분위기 없이 살고 있는 이유입니다. 주의 깊게 고민하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렵죠. 

어떻게든 소유하려는 조급함에, 일부분에 집중하여 상징과 선호를 무작정 사 모으기만 합니다. 하나의 주제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으면 이것인지 저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요. 그냥 복잡한 형태입니다. 널리 유통되는 공산품으로 비슷하게 차려입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안도감을 느끼다 보면, 그것이 그의 분위기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주체적인 고유성이나 신비감 등은 느껴지지 않겠죠. 

아름다운 존재가 되려면 분위기 있게 살아야 합니다. 단지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감정을 자아내는 개별 요소를 선별하여 나의 정서로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객관적인 옮고 그름은 없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분위기인가'는 곧,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1)
"건축은 형상이다. 물리적이고 실존한다. 나는 실제 건축물에 관심이 있다. 도면이나 가상화면은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건물이라는 특정 소재로 둘러싸인 공간이 존재감presences이나 분위기atmospheres를 가진다는 것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 『Les Thermes de Pierre (2001)
(2)
Peter Zumthor, 『Atmospheres : Architectural Environments. Surrounding Objects (2006)

건축가 페터 줌터Peter Zumthor는 건축이 반드시 경험되어야 한다(1)고 생각하여,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직접 출판한 저서는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짤막한 두 권의 책을 냈는데, 그 중 하나가 『Atmospheres (2006)』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작업을 할 것 같은 건축가가, 평생에 걸쳐 압축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분위기'라는 모호함이라니, 흥미롭지요.

줌터에게 분위기란, 건축의 본질을 압축한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분위기란 공간과 형태의 무수한 개별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추상적인 느낌의 일종이다. 평범한 듯 보이는 작은 요소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섬세하게 조율하여 하나의 감정으로 만들어야 한다"(2)고 썼습니다. 이것이 분위기의 작동방식입니다. 

건축과 사람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건축물은 스스로 환경과 반응하여 어우러지거나, 그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건축가는 물질을 조형하고, 구조와 디테일을 다룰 뿐인데, 고유한 감정과 분위기를 가진 어떤 존재가 일어섭니다. 오감에 영향을 주는 모든 것을 정교하게 선택하고 조형할 수 있다면, 인지와 관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분위기는 훨씬 까다롭고 섬세합니다. 상태, 물성, 위치가 정해진 물질을 다루는 것이 건축이라면,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매우 복잡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끝없이 움직이고 반응하고 관계하고 변화합니다. 감정과 생각은 시시각각 외부 환경에 맞춰 반응하고, 표정과 언행으로 즉시 표출됩니다. 관계 속에서, 우리의 자의식은 변화를 거듭합니다.

  

하나의 주제에 한 가지 감정을

이렇게 복잡한 건축을 한때의 유행하는 소재, 상업 브랜드나 유명인의 스타일 정도로 손쉽게 해결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어쩌면 성장에 가까운 과정일 것입니다. 분위기란 본질과 정체에 대한 이야기이며,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먼저 하나의 주제에 한 가지 감정을 담으세요. 당신의 주제는 결국 당신 그 자신입니다. 자신을 인정하고, 모든 세부사항을 선별하여, 나와 조화롭게 엮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요소들이 섬세하게 결합되어 일관성을 만들고, 전체의 완성도가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면, 그렇게 나만의 분위기가 깃들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정신은 개개인 고유의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알맞도록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신체는 생활과 생각에 의해 조금씩 다듬어지고, 그 생각은 관점과 가치관에 의해 움직입니다. 특별하다 못해 어떤 시적 분위기를 풍기는 인물의 본질도, 일상의 의식주와 무수한 선택들로부터 발원한 것입니다. 삶 자체가 당신의 디자인입니다. 

   

    

  • KORKOR
Suggested Reading
형태의 종점
The Final Destination of Form
몸의 이미지가 자본으로 기능하는 시대, 모두는 미디어에 전시되어 실체 없는 삶을 얻는다. 실재實在보다 더 실제實際적인 이미지들이 원본을 대체하고, 원본의 기억은 사라진다. 이제 사람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 옷을 입는다. 타인의 욕망에 의존한 채, 사회적 기준에 알맞은 모습이 되기 위해 스스로 몸을 재단하고 기획한다. 나르시시즘의 미디어 속에 갇힌 우리는 거울에 둘러싸인 인형이나 다름없다. 내면의 자의식과 무의식적 욕망 사이에서 불편함이 생기면, 자의식은 전시된 자신의 몸에 대한 자각을 갖게 된다. 이것은 잘 드러나지 않는 비밀스러운 정신의 일면이다. 부조화를 감지하고 정체성과 의미를 복원하려는 이 작은 움직임이 지금껏 우리의 인간성을 지켜왔다. 그러니 우리에겐 이미지 너머의 현실을 상기하고 실재를 기억하려는 작은 시도가 필요할 뿐이다. 한 번의 바느질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어떤 감각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본래적 방법에는 실재에 대한 기억이 서려 있다. 그러니 이 과정은 간소화되지 않는다. 과정을 따른 내면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점멸하는 바느질이 감각을 일으킨다. 만드는 이는 감각을 몸에 각인하며 지속적으로 실재를 마주한다. 손끝에 남은 감각은 다음 감각을 인도하는 선線이다. 복잡한 의도나 꾸밈없이. 감각이 감각을 따라 이어진다. 바느질의 속성은 기능하는 것이지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바느질이 보여지는 것으로 기호화하면 옷의 본질적 가치는 훼손된다. 기호는 옷의 외양外樣이고 기능은 내부의 의미이다. 기호는 기능을 모방할 뿐, 실재가 아니다. 갖지 않은 것을 가진 척하는 것이다. 반대로 기능은 의미를 가지지만 그 의미를 숨기려 한다. 전자는 <없음>에 속하고 후자는 <있음>에 속한다. 손으로 옷을 만드는 일은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이렇게 일백여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형태가 된다. 오염된 의지들이 제거된 상태, 이른바 원형이다. 원형은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다듬고 남겨준 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외양의 것들이 시간에 의해 사라지고, 모든 형태는 스스로 자기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자기로서 존재해야 하는 모습, 곧 형태의 종점이다. 시간을 견디는 바느질이란 형태의 종점에 도달하기 위한 길이자 그 기억을 상기시키는 재료일 뿐, 그 자체로 달성해야 하는 목적이 아니다. 옷은 우리 존재의 모방이다. 내 몸에 가장 가까운 형상을 한 복제이자 나의 실재를 상기시키는 오브제다. 그러나 시간에 따라 자기 모습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르지 않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실존하기 위해, 우리는 <있음>을 감각하고 기억해야 한다. 이 물리적 감각은 흩어지기 직전의 인간성을 현실에 잡아두는, 그러니까 정신의 닻이다. 우리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회복을 위한 실마리를 얻는다.
In the era where an image of body functions as capital, everyone is displayed in the media and obtains unsubstantial life. Images that look more real than the existing ones substitute the original, and the memory of the original fades away. Today, people wear clothes not as is, but to become something. Depending on others’ desire, they tailor and design themselves to fit into a social standard. Imprisoned in the media of narcissism, we are merely dolls surrounded by mirrors. When discomfort arises between self-consciousness and unconscious desire from within, self-consciousness begins to realize a displayed body of oneself. This is a side of unexposed, secretive mind. This little movement trying to realize disharmony and to recover identity as well as meaning has protected our humanity to this day. Thus, we need to try to remember the reality over images and existence. Sewing is some kind of sense that temporarily appears and disappears. The memory about existence is left in the original method from the old days. So this process is not simplified. It is because inner side that followed the process is what matters. Instantaneously flickering sewing arises the sense. A creator engraves the sense to the body and consistently faces the existence. The sense left at the tip of fingers is a line leading to the next sense. Without complicated intention or decoration, sense is followed by sense. The attribute of sewing is to function, not to be seen. When sewing is symbolized as something to be seen, the intrinsic value of clothes is damaged. Symbolization means the appearance of clothes and function refers to the inner side. Symbolization only imitates function, it does not exist. It is as if you pretend to have when you actually do not have. In contrast, function has its own meaning, but it tries to hide it. The former belongs to <nonexistence> whereas the latter belongs to <existence>. Making clothes with hands is a repetitive process of confirming <existence>. After hundred hours, it becomes a form. A state without polluted will, it is so-called the original form. The original form cannot be made deliberately. It exists as how time repaired it and left it. The outward appearance disappears along with time and every shape returns to its original form. The form of which one should exist as oneself, it is the final destination of form. Sewing that bears the time is a road to reach the final destination and a medium to remind that memory, not a purpose to achieve. Clothes are imitation of our existence. It is a replica of the closest form of my body and an objet that reminds of my existence. However, we are not different in terms of finding ourselves as time goes by. To not be lost, but to exist, we must sense and remember <existence>. This physical sense is a mental anchor that holds humanity, which is about to scatter, in the real world. We come back to this place and earn a hint for reco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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