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RICI

 

 

   

 

 

 

1.

인터뷰는 늘 실패한다. 아니 어쩌면, 그래야 한다. 언어의 발견이 바벨탑으로 결말을 맺었던 사건에는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말을 통해 서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믿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오해가 마천루처럼 쌓여갈 것이다.

첫인상을 스케치하는 만용이란, 이런저런 오해들을 그럴듯하게 나열한 스카이라인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저 '승효상'처럼 유명한 이에게는 타인의 시선을 차단하는 공적 방패가 있다. 그는 권태를 반복하는 것 말고는 내게 내어줄 것이 없다.

 

 

2.

'이로재履露齋'의 첫인상은 상상하던 것과는 좀 다르다. 원래 이름이 아니어서일까. 이슬 맺힌 풀을 밟는 선비의 성실함은, 농담처럼, 밤을 패는 설계사의 그것으로 치환된다. 붉게 녹이 슨 철제 박스의 귀퉁이를 올라,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둡고 좁다란 복도를 지나면, 갑자기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커다란 벽에 시선이 가로막힌다.

그 가운데, 마치 좌불상처럼 그가 무거운 벽을 등지고 앉아 있다. 승효상 선생은 꾸밈없이 소탈한 외모로 손님들을 대접하고 있지만, 이곳은 정말로 상대를 편안하게 둘 요량으로 설계된 공간은 전혀 아니다. 길고 육중한 테이블을 가로로 놓아 마치 강처럼 두 세계를 갈라놓고, 저 피안彼岸에서 건축가 홀로 차를 마시며 설법을 하는 자리다.

"單刀直入단도직입, 내가 검도를 참 좋아합니다. 검도는 딱 마주한 순간 이미 승부가 결정 나 버려요. 한 번의 출수는 단지 이겼음을 확인하기 위한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확신 없이 섣불리 움직였다간, 그대로 맞는 거란 말이지."

 

 

3.

​승효상 선생은 글 쓰는 건축가로 유명하다. 단지 예쁘고 비싼 건물을 세우는 것만이 그의 목적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주장이 분명한 사람이고, 세상에 하고픈 말도 많다. 신문지상에 발표한 칼럼을 보면 간결하고 명쾌해서, 그야말로 '단도직입' 한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건축이야기는 언제나 인문정신의 핵심에 도달해 있다"고 평했다.

그런데 어느 서평 프로그램에서인가, 건축 후 소감을 묻는 질문에 승효상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또 실패했구나, 하죠.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데도, 여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서, 저는 늘 강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확신으로 설계를 마치는데도, 드디어 이번에는 뭔가를 이뤄내겠구나 하는데도, 결국 매번 좌절에 빠지게 돼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는 단도직입은 그만한 확신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건축은 기어이 다른 사람의 삶에 관여하고야 마는 일이라, 충분한 고민이 없으면 자칫 삶을 해친다. 그러니 건축가의 일이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는 것이다. 누구라도 이 정도 무게의 질문에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유독 건축은 만천하에 전시된다. 단 하나의 선에도 도무지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불행한 자리. 그래서 그는 인문에 처절하게 매달리고, 그럼에도 매번 자책해야 할 운명이다.

 

 

4.

나는 그의 실패라는 것이 흥미롭다. 쉽게 찾아보기 힘든 장인의 열정이나 집념이라기보다, 이것은 완벽할 수 없는 한 인간으로서의 변명이다. 건축은 혼자서 뭔가를 표현해 내는 예술이 아니며, 조건에 따라 결과를 도출하는 수학도 아니다. 그의 말로 옮기자면, "이곳엔 완성해야 할 작의도 없고, 구현해야 할 개념도 없다." 그저 공간의 조형만으로 누군가에게 한 세계를,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선사하는 비스포크다.

이런 아름다운 작업이 어째서 실패란 말인가. 추측건대, 그에게 건축은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매번 그렇게 실패하고야 마는 것도, 그럼에도 다시 도전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는 에두르는 것에 서투르고, 친애와 연민을 도무지 치장할 줄도 모른다. 그동안 인류가 하늘에 닿도록 쌓아올린 바벨탑에도 관심이 없다. 무수히 흩어진 언어들을 주워 모으며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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